스토리와 조형성의 성공적인 결합이란 모든 화가들의 꿈일 것이다. 작가의 사유와 구체적 경험을 전하는 데 필수적인 스토리는 적절한 조형적 완숙함을 얻어야 회화로서의 가치를 얻을 것이고, 또 순수한 조형미의 완성을 지향하는 작업 역시 그것이 기호인 한은 조형언어로서 나름의 스토리를 지녀야만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박성수의 최근 작업은 이야기를 지향하는 특성이 강하다. 1999년 첫 전시회를 가진 뒤로 10년 동안 그의 작업은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는데, 무엇보다도 조형미의 완성을 지향하던 것에서 점차 주체의 발화, 즉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변모를 조형성의 희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조형언어의 모색이라고 보아야 한다. 지난 10년은 화가이기 이전에 한 사적 개인으로서의 성숙의 시간이며, 작품세계의 변화는 그 성숙의 주체인 자신을 표현하려는 내면적 요구의 결과일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세번째 전시에 대해 고충환은 무의식의 심연에 똬리를 틀고 있건 카오스를 인위적인 질서 체계 속에 재편하려는 욕수로 그것을 이해했다. 이 지적은 아주 예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완전한 것인데, 예리함을 작가의 변모를 조형언어의 프리즘 속에서 포착해낸 부분이며, 불완전함은 그것을 조형언어로부터 이야기로의 변모로까지 끌어올리지 못한 점이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을 고충환의 몫으로 돌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작가 자신이 그 변모의 도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짓 추상표현주의의 흔적이 남아있는 세계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발화하는 주체로 넘어가는 도정에 작가가 서 있었건 것이다.

그의 비해 이번 전시에서는 추상표현주의와는 분명한 선을 긋고 자기세계를 보다 확연히 드러내려는 의도가 두드러진다. 흥미로운 것은 그 자기세계가 고독한 단독자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선 고양이와 개, 또 개와 오리의 배치로 나타난다. 물론 동물 캐릭터가 홀로 등장하는 작품이 없지 않으나 그래도 둘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더 지배적이다. 그것은 작가의 세계 이해가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타자(他者)에게까지 넓혀짐으로써 관계에 대한 성숙한 성찰을 하게 되었다는 점을 증명한다.

박성수의 작업에서 고양이가 등장한 것은 2003년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Art Seoul' 전시부터인데, 그때만해도 고양이는 특이한 관찰대상에 가깝지 작가의 자아가 투영된 캐릭터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2004년의 세 번째 전시부터는 비록 단독자로 등장하지만 고양이가 작가의 분신처럼 캔버스 위를 노닐기 시작한다. 그의 고양이는 꽃을 바라보고, 푸른꿈을 꾸며, 행복한 상상과 함께 미소를 짓는다. 말 그대로 행복한 상상의 주체가 된 것이다.

하지만 상상은 언제나 현실을 필요로 한다. 현실은 상상의 도약을 가능케 하는 발판이자, 상상의 끝에서 다시 내려앉아야만 하는 귀환점이다. 상상의 주체로서의 고양이가 현실 속에서 타자를 발견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숙명이다. 그 어느 누구도 홀로일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아란 내가 생각하는 나만이 아니라, 타인이 생각하는 나, 타자와의 관계속에 있는 나, 이 모두를 일컫는 말이다. 나는 나이며 동시에 나가 아니다.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는 <활과 리라>에서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존재이며, 보다 완전해지기 위해 너를 맞으러 나간다고 적었다. "자신의 육체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에서만, 너무나 타인인 그 사람의 인생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자신이 될 수있다. 이제 타인이란 없다. 이제 둘이란 없다. 가장 완벽하게 자신을 소외시키는 순간에, 가장 완벽하게 자기 존재를 회복할 수있다. 이때 모든 것이 현존하며, 우리는 존재의 어둡고 숨겨진 이면을 본다. 다시 한번 존재는 자신의 내부를 드러낸다" 그에 따르면, 나는 너다.

물론 '나와 너'의 관계를 보여주는 박성수의 작업이 존재론적 성찰을 담는 지점에 까지 가 닿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수도 있다. 하지만 유아(唯我)론적 자아로서의 나에게 머물지 않고, 관계속에서 드러나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성숙한 시선이다. 때로는 행복하지만 또 때로는 그에 못지 않게 누추한 상처투성이 현실 속의 나를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인정 없이는 아름답고 행복한 꿈으로의 도약도 구체성을 가질 수 없다. 진정한 상상은 일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일상의 이해이며 일상의 승화일때 가능해진다. 그러니 관계속의 자아를 읽어내는 성숙함이야말로 불완전한 현실을 껴안는 힘이며 동시에 그 형실 너머의 행복한 세계를 꿈꾸는 의지인 것이다.

실제로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꿈꾸는 세계가 자주 등장한다. 원더우먼과 수퍼맨의 캐릭터 같은 것들이 그 예다. 물론 ;수퍼'와 '원더'의 능력이란, 갖고 싶기에 꿈꾸는 것이긴 하지만, 어쩌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꿈꾼다는 게 더 진실에 가까울것이다. 가시에 찔려 상처를 받고,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면서도 우리는 살고 있고, 그 삶이 바로 나의 것이며 내 행복의 출발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은 박성수의 세계에 녹아 있는 유머에서 잘 드러난다. 어쩌면 지나치게 소박하고 직설적일 수도 있을 그의 상상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유머다. 이 유머야말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지혜이자 동시에 현실을 뛰어 넘는 여유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1960년대의 '팝아트'를 떠올리게 만든다. 추상표현주의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끝에서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앤디와홀은 서서히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나갔다. 만화의 이미지를 차용한다든가,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빌어온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그들은 일상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박성수 역시 예술과 일상을 대립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예술가로서의 자신에 대한 정체성의 획득과 함께 타자와 세계를 향해 자아를 확산시킨 것이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존재의 관계와 거기서 파생되는 무수한 감정의 만화경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단색으로 처리된 그림의 바탕은 때로 너무 정태적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작가로서의 자기 결단일 수도 있는데,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늘 불확정적인 상태로 놓여 있는 자아에게 분명한 자기 색깔을 입히려는 무의식적 균형 잡기의 표현일 가능성 때문이다. 어쨌든 현실과 상상, 실체와 환영, 머무름과 떠남, 나와 너 등으로 변주되는 질문을 던지는 박성수의 세계는 자칫 무거워질 수도 있는 우리를 유쾌하게 이끈다.

예술이란 '실제 세계' 를 보여주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세계'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박성수는 관계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자기와 타자, 더 나아가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상상 속에서 행복한 존재로서의 자기 호흡을 얻는다. 그것은 생명으로서 가질 수있는 아름다운 리듬과 이미지 그 자체다. 거기서 우리 모두 유쾌해지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그의 그림은 정말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