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성수가 그동안 그린 그림들을 보면 몇가지 주목할 만할 변화가 발견된다. 전작에서는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화면을 보여주고 있다. 감각적인 표현과 정념의 직접적인 표출이 중시되는가 하면, 행위의 장으로서의 회화관념이 표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꽃처럼 알아 볼 수있는 감각적 대상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그 대상이란 목적이기보다는 어디까지나 회화적 행위를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거침없는 붓놀림이 종횡무진 화면을 가로지르는 그림들에서는 주정주의의 성향이 뚜렷하다.

그리고 근작에서는 상대적으로 더 간결해진 화면과 이미지와 배경화면과의 분리, 그리고 현저하게 추상적이고 양식화된 화면과 대상을 환기시키는 요소가 아우러진 화면을 내놓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변화는 그 동안 무의식의 심연에 똬리를 틀고 있던 카오스를 전면적으로 인정하던 것에서 그 카오스를 일종의 인위적인 질서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일종의 유비(類比)의 장으로 전이된 것이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특히 두드러져 보이는 현상으로는 배경화면은 물론이고 화면에 도입된 대상마저 마치 실루엣과도 같은 색면으로 환원하려는 평면화의 경향성일 것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주요 모티브들. 예컨대 나무와 자동차 그리고 병과 같은 소재들은 최소한의 음영도 묘사도 생략된채 하나의 순수한 색면으로만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눈에 그 실체를 알아볼 수있는 것은 실재와 이미지를 매개하는 기호에 길들여진 우리의 인식과 지각 탓일 것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자면 작가의 근작은 대상을 날것인 채로 곧장 화면 속에 불러들이는 대신 이를 축약해서 표현하는 일정의 상징화와 기호화의 문법에 바타을 두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평면화의 경향성 자체는 모더니즘 회화의 산물로서, 그 논리에 의하면 회화는 감각적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점과 선, 평면과 생채등 회화가 가능한 최소한의 조건 곧 회화의 본질을 실현하는 것에서 그 당위성을 찾는다. 이 가운데 특히 평면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모리스 드니의 전언이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 즉, 회화란 화면위에 '재현되거나 서술된 어떤 사건 혹은 이야기이기 이전에 일정한 색채로 뒤덮힌 평면' 인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단색조의 배경화면과 최소한의 색면으로 화한 사물들의 이면에는 모더니즘의 논리가 깔려 있다. 그리고 이는 감각적 실재를 평면으로 환원하는 것, 그럼으로써 감각적 실제를 인위적인 질서 체계속에 재편하는 것, 그리고 기호와 상징의 문법으로써 감각적 실제를 암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2. 작가는 이번 전시에다가 " 행복한 상상, 이야기 소리"라는 주제를 부여하고 있다. 박성수의 그림은 일정하게는 상상의 산물인 것이며, 현실에 대한 재현의 논리와 회화 내적인 순수조형의 논리 사이를 오가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화면을 연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 상상은 과거의 기억에 그 맥락이 닿아 있는, 과거 지향적인 속성을 갖는다. 과거로부터 현재 속으로 호출해낸 기억의 편린들을 재구성한 것이며, 기억의 속성상 그 형체가 불분명한 것에는 일말의 뚜렷한 실체를 부여한 것이다. 이처럼 현재화한 과거는 가까운 일상과 함게 유아기적 시간, 그리고 나아가서는 논리적인 언어로는 붙잡을 수 없는 원형적 시간에 대해서는 현재의 삶이 상실한 것들, 잃어버린 것들, 잊고 사는 것들, 다시 돌이킬수 없는 것들에 접맥된 일정의 반문명적 메세지를 함축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원형적 시간은 이처럼 반문명과 함께 생체론 혹은 생기론에 그 맥이 닿아 있고, 이는 인위적이 논리에 자기를 맞추기보다는 자연의 질서, 가연의 생리에 자기를 일치시키려는 욕구를 표출로 나타난다. 이는 작가의 그림에서 특히 오일 페인팅에 의한 숙성돤 생각과 함께, 마치 어릴때 무심하게 낙서를 하곤 했던 흙벽이나 시멘트벽의 질감을 닮은 손에 잡힐 듯 우둘두툴한 질박한 마티에르에 의탁한 심상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치 어린아이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단순화된 사물 표현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보기에 따라서는 모든 시간 저편에 있는 것들, 모든 상실한 것들이 발원하는 근원으로서의 낭만주의에 그 맥이 닿아 있는 근작으로부터는 향수마저 느껴진다. 태생적으로 과거에 속한 향수는 일차적으로는 기억을 의미하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기억의 이런 질료들을 즐김과 탐닉의 대상으로 변질시키는 화학반응이 불러 일으키는 것에 있다. 그러니까 모든 기억의 질료들은 그것들이 현재화 할때에는 어김없이 놀이와 유희의 대상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향수는 단순한 기억의 재생 이상의 보다 역동적인 세계다. 그 속에서 과거는 끊임없는 현실과 소통하고, 지속적으로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과거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럼으로써 현재의 삶으로 하여금 어느 정도는 과거와 더불어 살게 한다.

박성수는 이런 향수의 대상으로서 각각 풍경을, 정물을, 그리고 고양이를 현재화한다. 이 그림들을 하나로 관통하는 요소로는 청색, 적색, 검정색, 흑색 등 특정의 주조색을 정하고, 그 색면으로 하여금 전체 화면을 장악하게 한 색면 구성과 평면적인 처리가 눈에 띤다. 그리고 여기에다가 역시 평면적으로 처리된 모티브를 부가한다.

이런 최소한의 화면에서는 단조롭고 심플한 느낌과 함께, 일말의 장식적인 요소마저 느껴진다. 대상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대신 최소한의 형태만을 암시하는 방법으로 그려져 있고 따라서 화면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그 자체의 개체로서보다는 화면의 한 조형요소로서 읽혀지고 기능한다. 이로부터 작가의 그림은 현실에 의탁한 메세지의 전달보다는, 일상에 그 맥이 닿아있는 상상력과 순수한 화면의 내적 원리가 만나는 접점에 맞쳐져 있음을 알 수있다. 그러므로 그의 풍경은 현실의 풍경이 아닌 현실을 자기의 안쪽으로 불러들여 내재화한 풍경, 심의적 풍경인것이다.

또한 작가의 정물화를 보면 정물과의 교감을 통해서 자기 내면에 부합하는 꿈과 동경을 풀어 놓고 있다. 평면처럼 심플하고 명료한 삶, 그러면서도 유아적이고 유희적인 동경에 그 질감의 결이 닿아 있는 삶을 꿈꾼다. 그러므로 정물은 작가의 심상에 의해서 해석된 정물, 심상으로부터 태어난 정물이다. 이처럼 하나의 정물은 그 본래의 뜻과는 다르게 단순히 죽은 자연이나 부동의 사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의미와 연결될때, 혹은 그 자체가 의미를 발생할때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물은 그것이 심지어 무생물 일때 조차도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속에 있고 그 때의 변화는 부동성에 반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물이 정물인것은 아니다. 하나의 사물에다가 생기와 역동성을 불어넣어 그 사물로 하여금 살아있는 정물로 다시 소생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감수성과 관련된 문제인 것이며, 작가의 정물화에서는 그 감수성이 엿보인다.

그리고 작가는 고양이를 그린다. 그림에서의 고양이는 몇마리가 모여 서로를 희롱할때도 있지만, 대개는 저 홀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물가에서 공놀이에 빠져 있기도 하지만 대개는 군락을 이룬 꽃밭이나, 나무 혹은 빈 하늘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상념에 빠져있는 고양이에다 꽃 서리, 꽃같이, 나른한 오후, 그리고 행복한 상상같은 제목을 부여하고 있는 것에서도 엿볼수 있듯이 작가에게서 고양이는 자화상의 일면이 있다. 고양이를 자기와 동일시 하거나 최소한 자기를 감정이입한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 고양이의 상념은 작가의 근작이 발원한 곳, 유아적이고 유희적인 시간, 느리게 흐르는 나른한 시간에 맞닿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박성수의 그림은 현실을 곧이곧대로 재현하기보다는 상상력을 작동시켜 그 현실을 자기화하고 내면화한다. 그 과정에서 현실은 상당할 정도로 회화와 화면의 자족적 원리 속에 포섭되고, 따라서 현실은 최소한의 형태로 기호화되고 암시된다. 이런 암시가 오히려 고정된 현실을 풀어 놓는다. 현실을 회화적 현실, 상상력의 프리즘을 통해 본 유기적 현실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것이다.